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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영광스러운 복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1장 16절 

11.1. 복음이 생명을 주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생명을 주는 일이기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광의 주체인 나 자신을 살리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이 복음으로 다독이시기 바랍니다. 복음으로 입고 복음으로 먹고 복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혹시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수치의 이유처럼 복음이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은 없습니다. 

11.2.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인데 이 또한 무조건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아무 조건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표현입니다. 믿을 때 우리는 얼마의 돈을 내었습니까? 얼마나 공적을 쌓아 그분의 진노를 가라앉혔습니까? 얼마나 노력했고 희생했습니까? 우리는 믿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을 받는다는 표현이 곧 믿음입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습니다. 오늘 교회에 출석한 사람과 평생을 교회에 다닌 사람과 구원의 차이는 없습니다. 

11.3.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던 유대인들이 먼저 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복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모든 헬라인들에게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순서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차이나 차별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완전하게 구원받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11.4. 복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복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아멘아멘 ​

10. 지속가능한 생명, 영생 

 

우리는 영생을 죽고 난 후의 생명의 연장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나중에 죽을 때에 영생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미래적 기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믿는 즉시 일어나는 생명의 지속가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생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신앙의 삶도 구원 안에 있는 생명의 지속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실재로 나타나는 존재적 변화입니다. 

​많은 경우, 현대교회가 분쟁과 시기, 불행과 반목 속에서 세월을 낭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024년 현재, 우리교회 근처의 수 많은 교회들이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참람한 일들로 분쟁과 혐오, 반목과 질시, 고소와 고발로 암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음란하고 속이고 저주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정죄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설교하고 설교들으며 스스로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보다 더 허무와 절망가운데서 살아가면서 마치 이런 죄 가운데서 불행한 일이 천국을 향하는 고행이라도 되는 듯 스스로를 자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지역교회 담임목사로 큰 교회로 떠나고자 했던 교우들을 축복하며 떠나보냈습니다. 순전히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그들이 꿈구던 관문에 들어서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자들의 홍보와 떠들석거리는 유행의 메가폰에서 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성심으로 믿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이 곧 영생이고 행복입니다. 즉, 그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바른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바른 교회는 지속가능한 영생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소망가운데 이 좁은 길을 찬양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지금,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지속가능하여 영생이라 칭하고 그것은 바로 지금 믿는 우리 모두에게 적실하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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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은 완전하고 온전합니다. 우리 인간의 선택은 매우 불안정하고 심지어 엉뚱하고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사람의 선택은 아무리 신중해도 실패와 낭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 인간의 판단을 멈추고 하나님의 선택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순종이라고 이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잘못될 수 있으니 잘못될 일이 없는 하나님의 선택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바를 순종함으로 선택하여 우리의 길을 안정적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의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항상 순종의 미덕을 떠올려야 합니다. 샬롬 

 
8. 교회는 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건물로 생각한다. 건물이 크면 사람도 많이 모이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건물을 크게 새로 짓는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다. 교인이다. 그래서 바른 신앙을 가진 교인이 많은 교회는 교회가 되며 엉터리 들이 모여서 큰 군중을 이루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바른 말씀이 없는 곳도 교회가 아니고 바른 신앙고백이 없는 곳도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모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인 조직이라서 사실 보이지도 않고 특정하기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름하여 무형교회라 부른다. 무형교회는 그 모양과 조직, 형태가 없어도 주님의 몸된 교회이며 유형교회, 즉 조직교회는 그 모양이 명확하여도 그 가운데 믿음의 사람은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다. 주님이 보실 때 주님의 백성이 진정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렇게 우주적인 교회이며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다. 최근에 다른 교회, 대체로 큰교회로 떠나간 교인들이 있다. 본인이 그들을 축복하며 보낸 이유는 교회는 사실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우리교회에 있으나 다른 교회에 가거나 상관없이 주님의 우주적 단일교회의 교인이기 때문에 달라진 것이라고 위치이동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리기 원했고 우리는 부담을 가지고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게 좀 다르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은 같다. 교회는 교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거나 크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냥 교회일 뿐이다. 교인들이 많지 않다고 위축되거나 많다고 교만할 이유는 없다. 자식을 많이 둔 가정도 있고 적게 둔 가정도 있다. 자녀가 없는 가정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가정이다. 이와같이 교회는 교인이기 때문에 숫자놀음에 휘둘려 힘들어하거나 깝죽거리는 가벼움이 없어야 할 것이다. 

7. 형이 왜 보호자에요?

 

아동상담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다. 특별한 아이들이다. 물론 바쁜 업무나 여러가지 이유로 특정한 아이를 반복적이고 정기적으로 상담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모든 선생님이 넉다운되고 이 아이를 데리고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이  상담실이니 내가 상대할 수 밖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기다려 주기로 했다. 대답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였는데 자기도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아빠나 엄마가 안계실 때 형이 보호자니까 형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왜 형이 보호자에요?" 

그의 말인즉슨 아빠나 엄마는 어른이니까 보호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은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형보다 가깝지도 않고 가족도 아닌 선생님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나름 여덟 살, 어린 친구로서는 상당히 논리가 있는 친구다. 

즉석에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들려주었다. 아빠 개구리, 엄마 개구리, 형 개구리가 살고 있었다. 불행히도 어느날 아빠 엄마 개구리가 뱀에게 잡아 먹혔다. 이제 아직 올챙이로 있는 동생 개구리를 공격할까봐 형 개구리가 뱀 앞을 막아 섰다. 형 개구리까지 먹어치운 뱀은 배가 불러 올챙이를 그냥 두고 돌아갔다. 동생 대신 죽은 형 개구리는 동생 올챙이를 보호하다 죽었으니 형 개구리는 보호자인게 아닌가? 물었다. 그러니 그렇다고 했다. 

"그래, 아빠는 일하러 가시고 엄마도 집안일이랑 아르바이트 하실 때 너를 보호하는 너의 형, 숲속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 모두 너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거야. 그러니 말 잘 듣고 고맙게 생각하고 인사도 잘 하고 즐겁게 지내자." 

아이는 목사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아이는 유순해져서 선생님들이 놀란다.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의 보호자이신, 우리 대신 죽음으로 사랑을 확증하신 예수님을 찬양한다. 이 글을 읽는 그대도 그리하시길...

​샬롬 더하기 샬롬 

6. 나의 할아버지 미술 선생님

 

나의 중학교 생활은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찐따였다. 학교에 대한 즐거움은 전혀 없었고 아침 일찍 나가 전자오락실에 갔다. 매일 출근했다. 

방과후에도 역시 전자오락실이 "즐거운 나의 집"을 대신한 즐거운 나의 안식처였다. 오락실 주인 아줌마가 어린 나에게 총무일을 맡길 정도였으니까.

여기서 총무라 함은 각 오락기 기계열쇠와 동전함 열쇠를 맡기는 사람이란 말이다. 정말 위대한 직분이었다. ^^ 

나의 중학교 시절의 에너지는 역시 전자오락실이었다. 내가 지금도 게임을 못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나는 오락실 총무로 지내면서 

언제든, 얼마든지 돈 없이도 오락기 게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승부에 대한, 게임동전에 대한 애착이나 아쉬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성창기업의 학교법인 성지중학교였다. 미션스쿨이었다. 내가 알기로 이경규씨도 우리 선배다. 매주  수요일 일교시에는 채플(예배)이 있었고 강당에 모여 예배드렸다. 나는 그림을 잘 그렸다. 물론 다른 것도 잘하지만, 쿨럭!!! 전교에서 제일 그림을 잘 그렸다. 매년 사생대회마다 항상 최우수상을 받았으니 좀 교만해도 될성싶다. 

하지만 내게 미술수업시간은 너무 부담스러운 시간이었다. 할아버지 미술선생님은 독실한기독교 신자로 교회의 장로님이셨다. 항상 가스펠을 부르셨고 "할렐루야, 예수님 이름으로 승리합시다."를 입에 달고 다니셨다. 나는 고작 1학점짜리 성경과목을 패스하기 위해서 예배 마칠 때 쯤 교회에 가서 주보를 가져오는 정도의 위선적인 초심자였다. 그런 나에게 미술시간은 지난 주일 교회에서 어떤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는지 "우리 죤이 말해보렴?" 그러면 나의 오락실총무 활동을 아는 친구들이 야유를 보내며 "하루종일 오락실에 있었을껄요?" 소리를 질렀다. 미술선생님은 그런 소리를 못들으신 건지 안들으시는건지 모른척하시는 건지 알 수 없는 미소와 축복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후로도 항상 복도에서든 미술실에서든 만나면 늘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던 선생님이셨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은 전교생 전체 운동장 조회시간이었다. 정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정도로 하기 싫은 일이었다. 주번이 아니어서 핑계거리도 없었던 나는 친구들이 다 나가고 나서 주번과 말을 맞추고 계란후라이가 있는 만만한 친구 도시락에서 후라이만 빼 먹은 후 책상에 엎드려 안락한 휴식을 즐겼다. 

복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전설의 학생주임 미친개님께서 떴다. 아이구 이거 *됬다. 벌써 몇 몇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줄줄이 끌려나오고 있는 듯 했다.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숨었다. 교실을 다 돌고 우리 미친개선생님께서는 화장실로 들어왔다. 문을 하나 하나 열던 선생님은 문이 열리지 않자 고개를 숙여 아래를 살폈다. 나는 변기 위에 까지발로 섰지만 "안에서 변기에 올라탄 새끼... 그냥 나온나.. 죽꼬싶냐?"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굴비처럼 엮여서 교장선생님 훈시 중에 강단 스텐드 옆에 형벌을 대기하고 서 있었다. 아이들이 낄낄대는 소리는 사실 들리지도 않았다. 조회가 끝나면 예정되 있는 참나무 몽둥이 허벅지 강타에 오금이 저릴 뿐이었다. 저기 멀리서 할아버지 미술샘께서 달려오신다. "아이고 체육샘, 뭔가 오해가 있는것 같아요. 우리 죤은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제가 이야기 좀 해 볼께요." 

연로하신 할아버지샘이 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늘 아래로 데려가자 우리 미친개선생님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그런 꼴이 되었다. 어쨋든 나는 살았다.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요..." "그럼 그렇지, 기도하자, 주님 우리 죤이 배가 너무 아픕니다. 주님 십자가의 사랑으로 치료해주시고 주님을 믿고 더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 아이의 평생을 주님 동행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거짓말로 나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피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런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해주셨다. 나는 평생 그분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이 일은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나는 크리스챤이 되었다. 그리고 내 꿈은 화가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사로 바뀌었다. 37년 전의 썰이지만 내게는 지금도 생생하고 그분이 그립다. 2021.0501.

 

죤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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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전한 곳은 없다.     

제목 : 정말 큰 일 날 뻔 (부제 : 생각만해도 끔찍한)

 

나는 20대 초반의 젊은 날에 1993년 장차 목사가 되기 위해 부산 B신학교에 입학했다. 

학생은 대략 70%정도는 남자였고 여자도 30%정도였다. 

나이도 직업도 상황도 다양한 사람이 모인 신학교여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경험했다. 

대부분 신앙의 열정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 왔으니 좋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신학교에 왔지만 어딘가 모르게 건들거리고 여학생들에게 추근대는, 그래서 신학교와 좀 어울리지 않는 그런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 K는 학과 공부시간에도 엉뚱한 질문을 한다거나 평상시 모습도 좀 추접스러운 태도와 말투였다. 그러나 뭐 각자 자신의 길을 가는거니까 그러려니 했다. 

 

나는 그때 사명감에 불타올라 신학교 안에서도 열심있는 친구들을 모아 “제자선교회”라는 동아리를 조직했다. 감사하게도 신입생 중에 아주 예쁘고 신비하도록 긴 머리(은하철도 999의 메텔같은)의 여학생 H도 우리 팀 멤버가 되었다. 우리는 노방전도도 하고 찬양모임도 가지며 즐거운 1학기를 보냈다. 

 

우리의 첫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각자의 젊음의 시간을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방학 언저리 즈음에 우리 동아리의 신비소녀 신학생 H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잘 지내죠? 요즘 몇 일째 자꾸 K어저씨에게서(우리보다 몇 살 많아서 어저씨라고 불렀던 것 같다) 연락이 와요. 잠시만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어떡할지 고민이어서 오빠에게 물어봐요.” 

 

솔직히 그 인간 내 맘속에 좀 재수없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신비소녀에게 추군거린다니까 짜증이 났다.

“절대, 만나지 말아. 무슨 이유로 그런데?” 

“그냥 만나서 밥도 사주고 싶고 얘기도 좀 하고싶다고...  “

“그사람 좀 안좋아보여, 이상해. 안만났으면 좋겠어”

“그래도 너무 사정사정하는데 잠시라도 볼까요?”

“아니! 느낌이 않좋아. 그 인간” 

“네... 그럴께요.”

그렇게 일단락했다. 

 

그 일 후 몇 일 뒤, G신문(국제신문) 사회면에 

“부산 모신학교 신학생,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 성폭행” 

이런 기사가 떴다. 엄마와 어린 딸이 있는 집에 침입해 엄마를 성폭행하고 금품까지 탈취했다는 기사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기사를 읽었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제대로 없었는데도 전국이 떠들썩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신학생이 바로 K였다. 

 

“오빠, 큰 일 날 뻔 했어요... 오빠 정말 고마워요.”

연락을 받았다. 

그날 나는 수 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이 떨렸다. 

내가 이런데 우리의 신비소녀 H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벌써 오래전 그인간 감옥에서 출소하고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잠시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모두에게 당부한다. 아무도 믿지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일단 아무도 믿지 마라.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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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박 

4. 자살하면 지옥가는가?  

1. 자살이 질병이면 지옥가지 않는다.  

교인의 자살은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 교우들 모두를 당황하게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서로 어색하고 부담스럽고 관계가 소원해지고 심지어 적대시 하기도 한다. 같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목사가 교리에 따라 자살자가 지옥에 간다고 하고 어떤 목사는 자살자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머나교회 K목사는 자살했음에도 그 교회의 당회는 과로사로 보도했다. 나중에 자살이 기정사실이 되었는데도 교인들은 K목사의 생전 설교영상을 시청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자살한다고 모두 지옥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 회심한 영혼은 그의 삶 가운데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노출되어 자살했다면 그가 어찌 지옥에 가겠는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은 것과 같이 우리의 멸망도 우리의 행위 때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은혜에 들어온 회심자의 질병에 의한 자살은 그를 지옥으로 이끌지 못한다. 

2. 멸망받는 자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되는 자살이 있다. 이는 자기 스스로를 살인하는 의지적 범죄의 결과이며 그의 살해의 동기가 그 자신을 죽게하였으므로 그는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받게 된다. 연쇄살인범이 더 이상 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답답함과 고통으로 자살을 선택했는데 이는 그가 반성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죽이므로 다른 이가 자신의 살해를 방해하지 않도록 또 하나의 생명을 죽이는 살인죄를 지은 것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멸망으로 향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남겨진 자에 대한 태도

 

사실, 인간의 사고와 판단, 이해와 해석에도 불구하고 구원과 멸망 사이의 결정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지껄이는 많은 말들은 죄를 짓고 죄를 강화하고 죄를 확대할 가능성이 많다. 자살한 사람의 가족들은 남겨진 자로서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겪게된다. 우리는 이분들에 대한 바른 태도와 인권을 지키고 그들의 존귀한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해석해선 안된다. 자살했으니 지옥갔다고 말하지 말고 남겨진 삶의 고통과 고독을 위로해야 할 것이다. 자살자와 자살자의 가족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변함없이 존중하고 배려하고 조심하고 진중해야 한다. 

4. 자살 예방의 노력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고 함께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살 예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방면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자살자는 급증하고 우리 자신이나 우리 가족과 교우들은 더 많은 자살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다해서 살아보자. 

3. 주님의숲교회 개척이야기 (정혜민목사의 "비빔톡" 라디오방송)  

박재환 목사의 개척이야기 라디오방송입니다. CTS 방송 실황가기 

​주님의숲교회는 2008년 3월 15일 부터 임마누엘의 삶으로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2. 강력하고 무서운 힘, 섹스 

1. 돈과 지위, 명예를 얻고난 후에 마지막 남은 쾌락, 섹스. 

박원순, 오거돈, 전병욱, 이재록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자신들의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고 인정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해오던 현장에서 상당한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만족스러운 환경에 들어갔고 가는 곳마다 환영하고 좋아하고 칭찬하고 인사하고 굽신거림을 즐기게 되었다. 쾌락의 끝자락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직 해소되지 못하고 만족되지 못한 쾌락은 섹스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섹스를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는 사람이 되었다하여도 본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인성이 여전이 내 안에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이는 그럴만한 여건이 되면 불쑥 튀어나오는 숨겨진 가시와 같다. 

2. 절제, 자기의 위치를 지킨다는 것. 

인간에게 절제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다. 그래서 중용의 덕을 가르친 현자의 판단은 매우 훌륭하다. 돈을 많이 벌거나 큰 권력을 취득할 때 우리 각 개인이 절제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면 누구라도 성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 절제는 자기의 위치와 한계를 지키는 것이다. 쾌락을 조절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승인된 쾌락 안에서 즐기는 삶이다. 이러한 절제된 삶은 정말 힘든 일인가? 그렇다. 

3. 절제를 위한 개인의 노력 

본인은 우리 각자가 절제를 위해서 노력해야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신부나 목사, 승려나 수녀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이나 시장, 연예인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인격훈련이다. 절제를 위한 개인의 노력은 다음과 같다.  자기성찰, 가족대화, 정기적 예배생활, 기도, 건전한 놀이, 여가취미활동, 독서, SNS 절제, 안정된 직장생활 또는 직업, 질서있는 생활패턴, 건강, 단순한 생활패턴, 좋은 친구, 조언자, 견제자, 정신과 상담, 사회봉사 등의 활동 등이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 있다. 

4. 안정되고 정상적인 부부생활 

모든 환경이 뒷받침되고 문제가 없어보여도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부부생활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가장 큰 균열이고 가장 근저에 있는 문제가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부분이 부부생활이기도 하고 모든 좋은 환경을 무색하게 무너트릴 수 있는 것도 부부생활이다. 

잘 생각해보라. 왜 그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으며 남부러울 것 없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게될지도 모르는 섹스를 선택하였는가? 그것은 그정도로 강력하고 그 모든 것을 걸고 올라갈 만큼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쾌락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일은 부부관계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이나 더 좋은 아파트, 자식의 성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착각하면서 산다. 어느정도 옳은 판단이다. 실재로 우리는 그러한 일들로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성공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즐겁고 아름답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섹스가 없다면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상당히 불행할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은 필요없다. 오늘 뉴스를 보라.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우리나 우리 친척의 가정을 살펴보라.  

서두에 언급한 성적으로 타락하고 무너진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에서 행복했다면 사실,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의 성적인 타락은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지만 그 중심에는 부부생활이 버티고 있다. 

5. 어떻게 이 행복을 지킬 것인가?

만약 당신의 가정의 행복을 지키고 싶다면 먼저 부부의 행복을 지켜야 한다. 만약 당신이 부부사이에서의 행복을 지키고 싶다면 말, 행동, 섹스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해야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 마음이 닫히고 섹스는 불가능해진다. 행동에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면 좋은 섹스는 불가능하다. 섹스 중에는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노력하고 배려할 때, 즐거움이 극대화된다. 

나는 크리스천 가정의 행복을 기도한다. 나는 크리스천 부부의 행복을 기도한다. 나는 세상 모든 가정이 하나님이 선물로주신 섹스의 기쁨을 지속가능하게 누리고 즐기기를,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최상의 선물에 만족하고 집중하여서 어리석게 이웃의 아내를 넘보고 아이들을 착취하는 저주의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기를 기도한다.

결국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한다. 나는 오늘 조금 민망하기는 하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 했다. 

1. 코로나상황에서의 신앙생활 

1. 나와 너, 이웃의 생명을 생각하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항상 한 영혼의 존귀함과 영광에 있다. 어떤 목사도 사람의 생명을 등한히 여기거나 위협할 수 없다. 그러니 두려움이나 죄책감없이 비대면 온라인으로 예배드림은 옳다. 

2. 어둠의 영들이 드러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번 코로나 사태는 이단, 사이비, 사이비에 준하는 기성교단의 타락된 삶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시작으로 판단한다. 

3. 누구도 믿지 마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가 목회자라하여도 그의 가르침이나 삶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 우리가 믿고 따를 이유도 없다. 그 기준은 누구에게도 적용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그리스도로부터 떠난다면 본인을 떠나라. 

4.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아니며 우리의 구원과 삶의 지침서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임을 믿는다. 그래서 코로나 상황에서의 판단기준 역시 성경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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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는 생명다해 예배하며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예배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가족, 우리 이웃의 생명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집합이 안녕을 위협하지 않는 시간에서 예배를 금지한다면 그것이 정부가 되었든, 공권력이든 우리는 맞서 싸울 것이며 생명을 다해 집합하여 예배할 것이다. 예배는 본래 코이노니아,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인격적으로 교통하며 드리는 전인적 헌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도 예배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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